발주서를 보냈다고 거래가 법적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간 거래에서 스펙 불일치·납기 지연·결함 처리·분쟁 해결은 결국 계약서가 얼마나 잘 설계돼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가 생긴 뒤에 계약서를 꺼내면 이미 늦습니다.
1. 발주서(PO)와 계약서는 다르다
발주서(Purchase Order)는 "이 조건으로 물건을 주문한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품목, 수량, 단가, 납기가 담기지만, 분쟁이 생겼을 때 책임 범위를 규정하는 조항은 대개 없습니다. 공급사가 발주서에 서명했다고 해서 결함 처리 기준, 납기 지연 시 배상 범위, 준거법 같은 사항까지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
국제 거래에서는 거래 상대국의 법 체계와 업무 관행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지 않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약 없이는 무엇이 구속력 있는 약속이고 무엇이 단순한 관례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은 계약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에서 힘을 잃습니다.
계약서는 반드시 별도 문서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발주서에 계약 조건을 충분히 담고 공급사가 서명했다면 그 자체가 계약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분쟁이 생겼을 때 근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느냐입니다.
2. 사양(Spec) 조항 — 가장 흔한 분쟁의 출발
계약 현장에서 가장 자주 분쟁이 발생하는 지점은 제품 사양입니다. 구두로 합의한 내용, 이메일에 기재된 사양, 발주서에 적힌 내용이 서로 미묘하게 다를 때 공급사는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선택합니다.
계약서에는 제품 사양, 도면 번호, 재질·표면처리·치수 허용 오차, 품질 기준, 테스트 방법을 명시해야 합니다. 도면이 있다면 도면을 계약 첨부물(Exhibit)로 포함하고 도면 번호와 버전을 계약서 본문에 명기합니다. 발주 이후 사양이 변경될 때는 변경 지시서(Change Order) 형식으로 별도 합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메일 교신으로 변경을 확인했더라도, 계약서와 별도의 문서라면 나중에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습니다.
중국 공급사와 거래할 때는 계약서를 중국어와 한국어(또는 영어)로 병기하고, 해석 충돌 시 어느 언어본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명시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번역 과정에서 기술 용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핵심 사양은 수치와 도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언어 의존도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3. 납기 조항 — 약속을 의무로 만드는 방법
납기는 발주서에 날짜로 기재되지만, 지연됐을 때 어떻게 되는지가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납기 지연 시 패널티(LD: Liquidated Damages) 조항이 없으면 공급사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 외에 책임질 수단이 없습니다. 현장 일정이 밀리고, 후속 공정이 지연되고, 추가 비용이 발생해도 발주자가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LD 조항은 일반적으로 지연 일수에 계약금액의 일정 비율을 곱하는 방식으로 설계합니다. 동시에 패널티 상한(Cap)도 함께 설정해야 공급사가 배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거래 자체를 포기하는 극단적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은 납기 패널티와 직결됩니다. 천재지변, 전쟁, 파업은 통상 불가항력으로 인정되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 "내부 생산 문제", "통관 지연" 같은 사항을 불가항력에 포함할지는 계약서에서 명확히 해두어야 합니다. 범위를 넓게 열어두면 공급사가 지연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발주서 vs. 계약서 — 커버 범위 비교
| 항목 | 발주서(PO) | 계약서(Contract) |
|---|---|---|
| 품목·수량·단가 | ✓ 포함 | ✓ 포함 |
| 납기 날짜 | ✓ 포함 | ✓ 포함 |
| 납기 지연 패널티(LD) | 통상 없음 | ✓ 명시 가능 |
| 결함·보증 처리 기준 | 통상 없음 | ✓ 명시 가능 |
| 불가항력 범위 정의 | 없음 | ✓ 명시 가능 |
| 준거법·분쟁 해결 방식 | 없음 | ✓ 명시 가능 |
| 비밀유지(NDA) | 없음 | ✓ 별도 체결 또는 통합 |
※ 발주서가 계약서의 역할을 부분 대체하는 경우도 있으나, 크로스보더 거래에서는 책임 범위를 별도 문서로 명시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4. 결함·보증 조항 — 도착 후가 진짜 시작
물건이 도착한 뒤 결함이 발견됐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를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공급사는 "출고 후 책임 없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는 검수 기간, 보증 기간, 결함 통보 방식, 불량 처리 방법(교체·환불·재생산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합니다.
검수 기간을 너무 짧게 설정하면 현장 설치 후에야 드러나는 결함을 커버하기 어렵습니다. 설비·부품처럼 실제 작동 전에는 결함을 파악하기 어려운 품목이라면 "설치 완료 후 실운전 기준"으로 보증 기간 기산 시점을 잡는 방식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 공급사 입장에서 보증 기간이 예측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실운전 시작 시점 통보 의무와 최대 기산 시한을 함께 설정해 균형을 맞추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결함 처리 방법도 선택지를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체 또는 환불, 발주자 선택"과 "공급사의 재생산 의무, 납기 별도 합의" 중 어느 방식이 실제 상황에 맞는지는 품목의 특성에 따라 다릅니다.
5. 준거법과 분쟁 해결 조항
분쟁이 생겼을 때 어느 나라의 법을 적용하고 어디서 해결할지를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소송이나 중재를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자체가 다툼의 대상이 됩니다. 상대국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언어·비용·기간 면에서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한·중 거래에서는 중재 조항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송에 비해 진행이 빠르고, 비밀 유지가 가능하며, 중재 판정의 집행 가능성이 비교적 높기 때문입니다. 중재지와 중재 기관은 계약 체결 시점에 명확히 합의해두어야 중재 시작 시 절차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준거법(어느 나라 법을 적용할지)도 함께 명시해야 합니다.
분쟁 해결 조항은 "분쟁이 날 것 같아서" 넣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조항이 명확할수록 불필요한 강경 대치 없이 빠르게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적 절차가 눈앞에 있을 때 실무적 타협이 빨라집니다.
계약서는 문제가 생긴 뒤 꺼내는 문서가 아니라, 거래 전에 분쟁 가능성을 줄여두는 도구입니다.
6. NDA — 언제, 왜 필요한가
공급사에 도면, 설계 사양, 고객사 정보, 가격 구조를 공유해야 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이때 비밀유지약정(NDA)이 없으면 해당 정보를 경쟁사에 제공하거나 동일 스펙의 제품을 다른 경로로 납품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NDA는 발주 전 견적 요청 단계부터 체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내용에는 비밀 정보의 범위, 유효 기간, 반환·파기 의무, 위반 시 손해배상 기준을 포함합니다. 계약서 본문에 비밀유지 조항을 통합하거나 별도 NDA를 첨부 형태로 연결해 두면 관리가 단순해집니다.
실무에서는 공급사 발굴·견적 단계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NDA 체결이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면이나 핵심 사양을 공유하기 전에 NDA가 서명된 상태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체크포인트가 되어야 합니다.
7. 계약서 없이 시작하면 생기는 일
소규모 거래나 오랫동안 거래해온 공급사라도 계약서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거래는 무사히 끝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협상력이 사라집니다. 스펙이 달라도 "이 정도면 맞지 않냐"는 말에 대응할 수단이 없고, 납기가 늦어도 "다음엔 잘 할게"라는 답 외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국가 간 거래에서는 이 비용이 더 큽니다. 한국에서 소송을 진행하려면 공급사 현지 소재를 확인하고 국제 송달을 거쳐야 하며, 판결을 집행하는 절차도 복잡합니다. 계약서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보다 분쟁 이후의 비용이 훨씬 큽니다.
또 한 가지: 계약서 협의 과정에서 공급사가 어떤 조항에 주저하는지를 보면 상대의 실행 역량과 리스크 성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LD 조항에 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보증 기간을 짧게만 주장하는 공급사라면, 그 이유를 발주 전에 확인하는 것이 낫습니다.
블랭크선데이는 공급사 선정과 조건 협상 단계에서 계약 구조를 함께 검토합니다. 발주서 발행으로 끝나지 않고, 납기·검수·결함 처리·분쟁 해결까지 실제 거래가 완료되는 기준을 계약서 안에 담는 것을 기본으로 봅니다. 거래 구조가 명확할수록 공급사와의 관계도 더 오래 유지됩니다.